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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리

1914년, 진주군 명석면 장흥동(長興洞), 석방동(石坊洞), 남성동(南星洞)으로서 남성리(南星里)라 하였다.

남성(南星)

남성리는 추동을 경계로 긴 협곡(峽谷)을 이루고 있으니, 리(里)의 길이가 무려 십여리나된다 이 좁고 긴 골에 조그마한 들이 열린 곳마다 마을이 이루어져 있으니 제일 아래에 있는 마을을 남성골이라 하고 중간에 있는 마을을 돌방(石坊)이라 하고, 제일 윗편에 있는 마을을 장골이라 하니 모두를 남성리라 부른다. 아랫마을 남성은 옛 촌명을 남상(南上)이라 하였으니 약 300년 전부터 경주김씨(慶州金氏)들이 살아왔으며, 그 뒤를 이어 수원백씨(水原白氏)들이 입주하여 함께 살아왔다. 동리 앞에 강대밭이라는 들이 있으니 수원이 좋고 토질이 비옥하여 곡식이 탐스럽게된다. 중간마을 돌방은 앞산이 돌로 뭉쳐져 악산(惡山)이라 부르니 여기에 연유된 지명이며, 주로 김녕김씨(金寧金氏)들이 살아왔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큰 저수지가 들어앉아 옛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니,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된다 함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윗편에 있는 장골은 돌방에서부터 거리가 오리가 넘으니 장골이란 지명 역시 이에 연유된 것이다. 임진왜란시에 경주김씨(慶州金氏)가 피난차 제일먼저 입주하였고 그 뒤를 이어 양천허씨(陽川許氏)와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들어왔다. 길다란 들이 골을 따라 펼쳐져 있으니, 옛부터 여기에 곡식을 먹고 큰 사람은 죽은 영장도 무겁다는 말이 전하여 온다. 또한 장골에는 옛부터 모기, 거머리, 논고동이 없었으니 전해오는 이야기가 이 세 가지가 생기면 김씨들이 망하여 떠난다고 하였으나, 세상이 변함에 옛 비결도 안맞는지 지금은 모기가 끓고 거머리와 논고동이 생겼다가 농약으로 성하지 못하되 김씨들이 아직까지 여전히 살고 있다.

불당골

남성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그곳에 노구치(老狗峙)라는 바위가 있으니 아이들 이 종기가 났을 때에 기도를 드리면 잘 나았다고 한다.

무재(霧裁)

마을 뒷편에 있는 높은 봉우리이다. 항상 구름이 머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텃골(基어)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이곳에 동리가 있어 번창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기와장이 출토된다.

아랫고개

남성에서 계원으로 가는 고개이다. 큰 돌조산이 있었다. 길을 넓히면서 허물어 버렸다.

웃고개

돌방이에서 계원으로 넘어가는 재이다.

붐북재

돌방이에서 신기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후미쳐서 혼자서는 잘 다니지 못한다.

안창골짜기

돌방이 뒷편 골짜기이다.

절터

장흥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신선바위

절터뒤에 있는 넓따란 바위이다. 옛날에 신선이 놀았다고 한다.

옥녀봉(玉女峰)

장흥동 뒷편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여자가 머리단장을 한 것처럼 아름답다.

등이재

장흥동에서 집현 응석골로 넘어가는 재이다. 등(嶝)을 사이한 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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