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진주군 마동면 내촌동(馬洞面內村洞)으로서 내촌리(內村里)라 하였다.
1969년 남강댐이 되기 전 내촌마을 주거호수는 96호, 족정(足亭)마을 호수는 78호로 2개 마을이었다. 당시 진주에서 평거(平居) 잠수교를 경유, 내촌리 내촌마을, 족정마을을 거쳐 사천, 완사를 경유 하동으로 통행하는 대로였는데 사람, 자동차, 우마차의 왕래가 많아 번화한 거리였다. 특히 내촌마을, 족정마을은 살기 좋은 곳으로 전분공장 또는 큰 상점이 있어 돈이 많이 끌리는 곳이었다. 마을 앞 강변에 규모가 큰 전분공장을 세워 진양군, 사천군, 산청군, 하동군 4개군 6개면 내에서 생산된 고구마, 감자를 전분가공용으로 1일 3만㎏를 수집하여 많은 전분을 생산한 곳이다. 남강댐 수몰 전 족정마을에서 무 종자를 생산하여 많은 소득도 올렸으며 고구마, 감자, 무 등이 특히 많이 생산되던 곳이 지금은 물속으로 변하고 족정마을은 한집도 없이 69년에 철거되었다.
내촌리 마동(馬洞)에 있었다. 전 함양군수 이순(李純)이 지은 것으로 좌의정(左議政) 청라(菁蘿) 김극성(金克成)이 관찰사(觀察使)가 되었을 때에 편액을 걸어 외손 류기경에게 전했더니 지금은 폐토화 되었다. 족정마을의 이름도 이 족정의 이름을 딴 것이다.
족정(足亭)의 서쪽에 있었다. 절벽(絶壁)이 뾰족하게 서 있고 구부려보면 맑은 못에 다다른다. 문병(文炳)이 지은 것인데 그의 손서(孫서) 김운익(金雲翼)이 관리하다가 병화로 불탔다 한다.
내촌리 내촌마을에 있는 산골 이름이다. 미륵이 있었다고 하여 미륵골인데 현재는 그 미륵이 내촌리 대덕암에 보관되어 있다.
내촌마을 중에서 제일 높은 곳에 마을과 양조장이 있었다. 내촌리 최성기(最盛期)에 시장이 있었고 한동안 번화한 성시(盛市)를 이룬 곳이기도 하였다.
마당재 송림 숲속에 약 2만평 평지가 연꽃형격으로 생겼다 하여 연꽃설이라고 하며 그 가운데 묘소가 진양군초대의장 겸 경남도의원이었던 해주정씨 정한재의 6대 조모 산소라고 하며 연꽃형격이어서 석물(자판, 망두)을 건립하지 않고 있다. 옛 전설에 의하면 마동에 명산이 한곳 있다고 전하고 있어 이곳이 명산일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내촌리 산비리에 있는 작은 암자로 미륵골산 인근에 있다.
내촌리에 있는 돌비로 본래 마동촌(馬洞村) 흙속에 묻혔던 것인데 비면(碑面)에는 경신중의(輕信重義) 함구장(陷救將) 강용진정표(姜用珍旌表)라고 12자가 쓰여 있으나 어느 연대 누구의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비문의 뜻은 자신보다 의(義)를 무겁게 여겨 적중의 장군을 구했다는 강용진의 정표라고 표하고 있다.
내촌마을 안마을에 있었다. 대원군의 서원철거로 인하여 없어졌다. 지금 그 서원 터에 조그마한 비를 세워 표시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진을 쳤다 하여 왜마당이라 하고 건너편 당촌리 산에 산성(山城)이 있다.
가운데 못이 있는데 역적의 집터라 해서 못을 팠다는 설이 있다. 지금은 남강댐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촌리, 당촌리 일대를 마동이라고 한다. 내촌에 있는 산 형국이 말과 같이 생겼으며 말머리를 당촌리 쪽으로 두고 있어 당촌 마을에 말안장이 있고 말굴레가 있어 마동이라 이름지어 구한말 마동면으로 하였다.
철종 13년(1862) 2월 18일에 진주에서 이른바 민란이라는 농민항쟁이 있었다. 이때 마동의 영장인 정남성 성부인 최진사 등의 가옥도 불태웠는데 이들 3인의 부호는 원우역의 명목으로 농민들을 혹사한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