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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소를 기르는 강추삼씨 | ||||||
빚으로 산 소 도둑맞고 주위도움으로 돼지 사고 그 인연으로 결혼도 했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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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인간이 나누는 깊은 애정 같은 것. 강추삼 씨를 만나기 위해 소훈련장이 있는 판문동 상촌마을을 찾았을 때 언덕 위에 있던 그는 ‘소 강타의 목 아래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림같고 동화 같은 느낌이었다. “애완동물이지요. 우리 식구고. 덩치가 클 뿐”이라고 한 그는 2002년 초 정육점을 할 당시, 마산시 진전면에 도살할 소를 사러갔다가 운명적으로 강타를 만났다. “620kg 짜리 황소였는데, 싸움소란 걸 단박에 알아봤지요. 첫 대회에서 3등을 했습니다”했다. “말을 못할 뿐, 사람과 똑같습니더. 순한 소지요. 인간의 심정을 아는 영물인 것 같고, 경기장에선 싸움시작과 함께 바로 타격을 가하는 타고난 싸움솝니다”했다. 강씨는 인터뷰 내내 옆에 버티고 선 강타를 들어 라는 듯 칭찬했다. “참 믿음이라고 그럴까예. 아침에 ‘잘잤나’고 물으면, 느낌이 와집니다. 대회에는 우락부락한 눈으로, 목을 치켜들고 근육을 들어내면서 위협을 주지요. 평상시에는 애교스럽고, 안기고 싶어 하고…” 강 씨는 지금 싸움소 10마리를 기른다. 소여물(그는 ‘소밥’이라고 했다)에 보리 옥수수 우엉 감자, 인동초 등을 섞어 끓여 주는데, 항상 강타에게 제일 먼저 가져간다고 한다. 소훈련장은 소의 등처럼 생긴 7000여평의 산언덕이었다. 황소들은 멍에에 대형타이어를 매달고, 거친 숨소리를 내며 언덕 위아래를 빙글빙글 돌았고, 가끔 고삐 메여진 소들이 땅에 등을 비비며, 먼지를 일으키는 장관을 가끔 연출하기도 했다. 소싸움대회에서 8강에 진출하면 어떤 경기든 출전할 자격이 주어지지만 소싸움대회에 나오는 거의 80%의 소는 8강에 들지 못한다. 강씨는 “강타와 강쇠와 같이 8강에 드는 소는 4마리를 보유”하고 있다. 겸손했지만 느낌으로 오는 그의 자부심은, 온전히 소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같았다. 이런 자부심과 겸손이 있기까지 강씨는 평생 소처럼, ‘진정’ 부지런하게 살아온 사람 같았다. 17세의 소년시절부터 강씨는 소와 인연을 풀어냈다. “가난한 집인데 부친이 담석증 때문에 매일 아프셨지요. 빚을 졌고, 아픈 분이 매일 시커먼 꽁보리밥을 먹는 것을 보고, 17살에 ‘고용살이’를 2년 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갔고, 제 인생의 밑천이 됐으니 부끄럽지 않습니다”했다. 강씨는 젊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새벽 4시 이후에 일어난 적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살다보니 ‘돈을 빌려줘도 될 사람’ ‘딸이 있으면 사위삼고 싶은 사람’으로 동네 평판이 자자했다. 그러다 군대를 다녀왔고, 가진 것없이 막막한 세상살이를 시작했다. 서너 마지기 물려받은 땅은 동생에게 양보하고, 당시 8만5000원을 빚내 소를 샀다. 하지만 빚으로 마련한 소를 그는 도둑맞아버린 일대의 사건이 발생한다. “눈물이 났지요” “그런데 여기 동네분들이 저가 소를 잃어버렸다고 3일 밤낮을, 온 천지를 저와 함께 찾으러 돌아다닌 겁니더.” 소는 결국 찾지 못했다고 했다. 이후, “그렇게 자기 일처럼 절 걱정해 주시던 분들이, 500원 1000원 씩 돈을 모아, 2만8000원을 만들어 ‘돼지라도 사서 기르라’고 저에게 주시는 깁니더.” “참, 그 은혜 어떡하면 갚을런지….동네분들이 절 살리신 거지요.” 28세에 그는 결혼했다. “저에게 중매가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그중에 하루는 딸 시집보낸다고 송아지를 기르고 있는 분이 계셨는데 ‘우리 딸 데려가게. 송아지도 같이 가져가게’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소 잃어버렸을 때 돈을 모아준 목록을 확인해 보니까 그분이 자그만치 3000원을 주신 분이었십니더. 그분이 저를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아뒀구나란 생각도 들고… 잃어버린 소가 배필까지 얻어주는, 그런 인연을 만들어 준 거지요.” 34살에 명석면에서 떡방앗간을 운영해 돈을 벌고, 진주시내에서 음식점을 했지만 ‘쫄딱’ 망해버렸다. “예식장 옆 식당에 손님들이 바글바글하는데, 예식장 옆에 식당을 하면 ‘떼돈 벌겠구나’고 생각했십니더”. “망경동 육거리 근처에 대지예식장이 있었는데, 장사를 시작했지요. 그런데 결혼철 지나고 나니까 손님이 없는 겁니더, 쫄딱 망했지요.” 다음으로 그는 중앙시장에 정육점을 개업했다. “정육점은 ‘육수간’이라고 해서, 좋은 소리 못듣던 시절이었습니다”했다. “소를 기르고, 안다고 생각해 시작했는데, 손님이 없는 깁니더.” “고기 사러오면 반드시 웃게 하고, 한번은 앉았다 가게 하겠다고요.” “친절하게 하니까 ‘저 사람은 아가씨도 할매도 다 친구’라고 소문이 났더라고예.” “친절로도 안되길래, 보험아줌마들을 끌어 모아서, 보험을 마구 들었지예. 한달에 자그마치 700만원정도로 보험금이 나갔습니더(웃음). 아줌마들에게 ‘당신들도 살고 나도 살자고, 제발 아는 사람이라도 소개 좀 시켜주고, 같이 오라고 했습니다.” 몇 년 하다 보니 ‘진주에서 최고다’란 소릴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의 소싸움 훈련장으로 고향 판문동 상촌마을에 땅을 사고, 사람 같은 소, 강타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진주투우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소 강타는 1년에 11~12회정도 대회에 나간다. 2006년 일반 갑종에서 우승하는 등 크고 작은 대회에서 우승하거나 수상했다. 1년에 강타가 벌어들이는 수익이 1000만원 정도다. 지금의 전국 소싸움판은 절대강자가 없는 춘추전국시대가 됐다. 강타는 저돌적인 공격형 소다. 전국의 소는 강타를 이겨야 우승할 수 있다. 지나고 며칠, ‘강타의 목 아래 그늘’에 앉았던 강씨의 얼굴이 자꾸만 생각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