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반성현의 의창(義倉)이 소재함. 이때 "곳집倉자"의 유래로 창촌리라 전해옴. 한편, 별호로 "片月"이라는 구전이 있음.
창촌리에는 창촌, 구리, 시정, 신기, 신촌의 5개 마을이 있다.
고려 현종 및 조선 시대부터 창고가 소재한 마을이라 하여 창촌으로 불렸다.
창촌에서 가선리 가곡으로 넘어가는 해발 100m 정도의 고개로서 옛날 함안지방으로 내왕하면서 쉬어가던 곳이다.
면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반성시장이 있는 마을이다.
구리 동남쪽에서 반성으로 가는 고개이다. 느티나무 정자가 있어 옛날에 동신 제를 지냈으나 국도 개설 후 없어졌다.
창촌, 구리, 시정 3개 마을 소류지로서 하류 농경지 관개용으로 이용하였으나 주택지로 변하여 폐지되고 공동소유자인 김일용 외 2명이 창촌 내동 합동회에 반환하고 90년 7월 18일 공공용지로 활용하기 위해 진양군에 기증하였다.
구리 마을 구 도로변에 있다. 장날에 각 지역에서 나뭇짐을 지고와서 팔던 곳이다. 반성시장이 나무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창촌 중앙에 있는 큰 우물이다.
창촌리에 있다. 일명 "모래둑"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 지방 홍씨가 세도 를 부리며 살았다고 하며, 그 당시 마을 어귀에서 마을까지 연못을 파서 풍류와 낚시를 즐겼고 못 가에는 정자나무를 심어 동네 사람들의 놀이터 로 삼았다고 한다.
창촌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반성시장이 있는 비탈마을로 반성 새마을유아원 이 설립되어 유아교육을 하고 있다.
조선말기에 형성된 5일장이다. 3일, 8일 장날이다.
시정마을 경사지에 형성된 장터이다. 현재는 대부분의 점포가 평지로 내려와서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시정마을 서북쪽시장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오솔길 고개이다. 시장이 개설되 면 먹고 몰래 피하기 위하여 넘어간다는 유래세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촌리 관음사 주변 야산이다. 산의 생김새가 개의 머리와 비슷하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후 창촌 137번지에 면사무소 건립시 생긴 우물이다.
옛날 지수면에 있는 부자인 허(許)씨, 구(具)씨들이 창촌리에다 양곡을 쌓기 위해 창고를 많이 지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구리마을 중앙에 위치한 우시장터이다. 도시계획사업으로 창촌 리 못 밑 으로 이전하고 현재 그 자리에는 축협사무실이 있고, 일부 공터가 있다.
일명 샛터라고 한다. 면사무소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창촌 안마을 뒤에 생긴 새마을이다.
신기 안마을에 있는 골짜기이다.
신기회관에서 서쪽 사봉면으로 가는 안길이다. 장승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개암리와 창촌리를 걸쳐 있는 보이다. 창촌들 관개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1925년 6월 15일 진주~마산간 열차가 개통되고 면사무소가 이전되었다. 생 향골(生鄕谷)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현재는 각 기관이 집중되어 도시형 태를 이루고 있다.
신기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반성현이 있을 때 반성 향교가 있었다고 한다.
신촌 북쪽 골짜기를 말한다.
창촌, 구리, 시정 3개 마을을 합하여 이르는 말이다. 신기, 신촌은 샛터라고 한다.
사봉에서 신촌으로 들어서는 도로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현재 면사무소 구내에 위치한 정자(느티나무)를 말한다. 심은 사람이 정씨라 하여 정정자라 한다.
신촌마을 안산 위에 위치한 절이다. 1929년에 창건되고 운천리 부도를 옮겨와서 보존하고 있다.
면사무소 앞 국도이다. 진주방향, 마산방향, 반성역방향, 반성지서방향으로 통 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면사무소에서 답천방면으로 가는 모래둑에 잇따. 진양궁도회 및 반성노인회가 있다.
샛터에서 사봉면 사곡, 봉곡리로 가는 고개이다. 공동묘지에 가는 길로 느티 나무 고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