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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는 진주목 동면 진성리 남산촌(南山村), 대연(大淵), 원통(原通) 등이다. 조선조 후기에도 외진성면으로 남산 밑이 되므로 남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주군 외진성면 원통동(元通洞), 사가동(四佳洞), 소야동(小也洞), 시목동(?木洞), 남산동(南山洞), 관사동(冠寺洞), 내진성면 백암동(白岩洞), 두목동(杜木洞) 각 일부로서 남산리라 하였다. 1950년 남사, 상남, 원통의 3개 마을 1962년 남사마을을 분동하여 남사, 관동, 시목, 금야, 1970년 관동 남사를 남산마을로 하고 시목, 금야는 금야(金野)마을로 흡수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남산리 3개 동의 남사마을이다. 1970년 관동, 남사마을을 남산마을로 개편하였다.
남산리 끝 마을이다. 일명 대밭골, 옛날 남사(南寺)라는 절이 있었다.
진주군 외진성면 지역으로 남산 밑이 되므로 남산이라 하였다.
죽동(竹洞), 죽전동(竹田洞)이라고도 한다.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대밭이 있었다고 한다.
남사 앞에 있는 들이다.
회비령 재이다.
시목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금야 옆에 있는 마을로 감나무가 많이 있었다.
시목동 서쪽에 있는 논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산리 3개 동의 남사(南寺)마을에서 1962년에 분동, 남사, 시목, 금야에서 시목, 금야를 합하여 금야마을이 되었다. 소야골, 쇠골로 불렸다. 옛날 금이 났다고 하며 쇠골은 금야마을의 속칭이다.
시목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시목 동쪽의 터, 죄인을 다스리던 곳이라 한다.
시목 남쪽의 골짜기이다.
금야 북쪽에 있는 산이다.
금야 북쪽에 있는 모퉁이. 지형이 누에처럼 생겼다 한다.
금야 서쪽에 있는 들이다.
시목 남쪽에 있는 논이다. 못이 있었다.
시목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지형이 바랑처럼 생겼다 한다.
금야 서쪽 웟산이다.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시목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전에 불당(佛堂)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시목 앞에 있다. 옛날의 사창 터이다.
시목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엤날에는 삼밭이 있었다.
시목 앞의 시장터이다. 옛날 활을 쏘던 곳으로 지금은 내와 뚝이 되었다.
금야 서족 산등성이의 굴 이름이다. 굴이 깊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 아 있다.
삼밭골에 있는 고개이다. 흰 바위가 있다.
시목 남쪽에 있다. 보가 셋인데 가장 밑에 있는 보이다.
소아 남쪽에 있는 긴 등성이다.
금야 동쪽에 있는 못이다
시목 동남쪽에 있는 논이다. 물이 많다고 한다.
외진성면 사가(四佳)동이다. 일반성면으로 편입되어 상남으로 개칭되었다.
남산리 상남 마을에 있다. 반성~고성간 도로에 네거리 형태를 이루고 있다.
반성고성간 지방도로가 이어지는 곳으로 진양군과 고성군의 경계에 있는 재이다.
일명 연기골, 상남마을 앞골짜기이다. 옛날에는 연호사(演呼寺)라는 절 이 있었으나 임진왜란때 불 타 없어졌다.
상남마을 앞 연호골 산밑이다. 옛날에는 상남 동네가 그 곳에 있었다 하며 집집마다 개를 많이 길렀다 하여 동네 이름을 견전동이라 하였 다. 지금은 자취도 없다.
상남에 있는 고적이다. 한월이란 중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네거리 재라고도 한다. 답천리에서 남쪽 상남마을로 가는 재이다.
보담산 정상에 있는 절이다. 임진왜란때 불탔다.
원동 입구 남쪽 골짜기이다.
상남 남쪽에서 고성으로 넘어가는 골짜기이다. 옛날 수리제언이 있었으나 지금 은 흔적도 없다.
상남마을에 있다. 남산리 4개동의 초등학교였으나 지금은 폐교되었다.
원동은 일명 원동(圓通)이라고도 한다. 보담산 밑 마을이다. 옛날 원통사(圓通 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며 원리라고도 한다.
원동 남쪽에 있는 원통사 터이다.
원통 남쪽에 있는 산이다.
원동마을 앞에 있다. 일제시대에 부역으로 구축된 것이다. 남산리들, 대사리들까지 용수한다.
원동마을 뒤 보잠산 밑 취락지이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원동마을 뒤 동쪽 골짜기이다.
원동마을 북쪽 산 밑이다. 일명 씨엄골이다. 원래 원동마을의 본동이었다.
보잠산 아래 골짜기이다. 옛날에는 숯을 구웠다고 한다.
원동에서 남쪽 개천면으로 넘어가는 골짜기이다. 조씨들이 살았다고 한다.